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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옹록(보제존자어록 서 普濟尊者語錄 序)
 스님  | 2005·01·30 09:08 | HIT : 949 | VOTE : 55

보제존자어록 서 (普濟尊者語錄 序)

현릉 (玄陵:공민왕)의 스승 보제존자는 서천 지공(指空)스님과 절강(江)서쪽의 평산(平山)스님에게서 법을 이어받아 종풍(宗風)을 크게 펼쳤다. 그러므로 스님의 한 두마디 말이나 짤막한 글귀라도 세상에서 소중히 여길 만하기에 어록을 펴내는 것이다.
스승의 도가 세상에 행해지느냐 행해지지 않느냐는 오로지 뒷사람들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런데 뒷사람들이 스승의 도를 알려면 그 분의 어록을 통하지 않고는 길이 없기 때문에, 자연히 제자들로서는 어록 출판에 힘쓰게 되는 것이다.
내가 변변찮은 재주에 왕명을 받들어 명(銘)을 짓고 또 그 어록을 추천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나의 행인가 불행인가는 뒷사람이나 알 것이다.
스님의 제자 각우(覺) ·각연(覺然) ·각변(覺卞)등이 옛 본을 교정하여 출판하려고 내게 서문을 청하므로 여기에 간단히 쓰는 바이다.
창룡(蒼龍) 기미년(1379) 8월 16일에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 씀.

서 (序)

행촌공(杏村空:李 . 고려말의 문신, 문하시중)이 나옹스님에 관한 기록을 내게 보이면서, 나옹스님은 연도(燕都)에 가서 유학하고 또 강남(江南)으로 들어가 지공(指空)스님과 평산(平山)스님을 찾아뵙고 공부하고는 법의(法衣)와 불자(拂子)를 받는 등, 오랫동안 불법에 힘써 왔다고 하였다.
원제(元帝)는 더욱 칭찬하고 격려하며 광제선사(廣濟禪寺)에 머물게 하고, 금란가사(金聆袈裟)와 불자를 내려 그의 법을 크게 드날렸으며, 또 평소에도 스님의 게송을 사람들에게 많이 보여 주었다고 한다.
본국으로 돌아와서는 산수(山水)속에 자취를 감추었는데, 왕이 스님의 이름을 듣고 사자를 보내 와주십사 하여 만나보고는 공경하여 신광사(神光寺)에 머무시게 하였다. 나는 가서 뵈오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던 차에, 하루는 스님의 문도가 스님의 어록을 가지고 와서 내게 서문을 청하였다.
그때 나는 "도가 같지 않으면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없는 법이오. 나는 유학 (儒學) 하는 사람이라 불교를 모르는데 어찌 서문을 쓰겠소"라고 하였다. 그러나 옛날 증자고(曾子固)는 "글로써 불교를 도우면 반드시 비방이 따른다. 그러나 아는 사이에는 거절할 수가 없다" 하였다.
지금 스님의 어록을 보니 거기에 `부처란 한 줄기 풀이니, 풀이 바로 장육신(丈六身:佛身)이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이면 부처님 은혜를 갚기에 족하다.
나도 스님에 대해 말한다.
나기 전의 면목을 이미 보았다면 한결같이 향상(向上)해 갈 것이지 무엇하러 오늘날 사람들에게 글을 보이는가. 기어코 한 덩이 화기(和氣)를 얻고자 하는가. 그것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나도 이로써 은혜 갚았다고 생각하는데, 스님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스님은 지난날 지공스님과 평산스님을 스승으로 삼았는데, 지공스님과 평산스님도 각각 글을 써서 법을 보였다.
소암 우공 (邵艤虞公) 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천지가 하나로 순수히 융합하니
한가한 몸이 온종일 한결같다
왔다갔다하다가 어디서 머물까
서른 여섯의 봄 궁전이다.
地天一醇融 閑身盡日同
往來何所缺 三十六春宮

대개 이치에는 상(象)이 있고 상에는 수(數)가 있는데, 36은 바로 천지의 수다. 천지가 합하고 만물이 자라는 것이 다 봄바람의 화기에 있듯이, 이른바 하나의 근본이 만 가지로 달라진다는 것도 다 이 마음이 움직일 수 있고 그치게 할 수 있는 것으로서, 나옹스님의 한마디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부디 지공스님이나 평산스님의 전하지 않은 이치를 전해 받아 자기의 법도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지정(至正)23년(1363)  가을 7월 어느날, 충겸찬화공신 중대광문하찬성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치사 직산담암 백문보 화보 (忠謙贊化功臣重大翠門下贊成事 進賢大提學 知春秋事致仕 稷山淡艤 白文寶 和譜) 는 삼가 서한다.

탐명 (塔銘)

전조열대부 정동행중서성좌우사랑 중문충보절동덕 찬화공신 중 대광한산군 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 지서연사 신이색 봉교찬 〔前朝列大夫 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 中文忠報節同德 贊化空臣 重大匡韓山君 藝文官大提學知春秋官事*成均大司成知書硏事 臣 李穡 奉敎撰〕
수충찬화공신 광정대부 정당문학예문관대제학 상호군제점서운관사 신권중화 봉교서병단전액 〔輸忠贊化空臣 翠紛大夫 政堂文學藝文官大提學 上護軍提點書雲觀事 臣權仲和 奉敎書幷丹傳額〕

현릉(玄陵)  20년(1370)  경술 9월 10일에 왕은 스님을 서울로 불러들이시고, 16일에는 스님이 머무시는 광명사(廣明寺)로 나아가셨다. 양종오교(兩宗五敎)의 제방 납자들을 많이 모아 그들의 공부를 시험하고, 그것을 공부선(功夫選)이라 하여 임금이 친히 나가 보셨다.
스님은 향을 사른 뒤에 법좌에 올라 말씀하셨다.
"고금의 격식[臼] 을 모두 부수고 범성(凡聖)의 자취를 다 쓸어버리며, 납자의 목숨을 끊어버리고 중생의 의심을 떨어버린다. 잡았다 놨다 함이 손안에 있고 신통 변화는 작용[機] 에 있으니, 3세 부처님이나 역대 조사님네나 그 규범은 같도다. 이 법회에 있는 여러 스님네는 사실 그대로 대답하시오."
그리하여 차례로 들어와 대답하게 하였는데, 모두 몸을 구부리고 땀을 흘리면서 모른다고 하였다. 어떤 이는 이치는 알았으나 일에 걸리기도 하고, 혹은 너무 경솔하여 실언하기도 하며, 한마디 하고는 물러가기도 하였으므로 임금은 매우 불쾌한 빛을 보이는 것 같았다. 끝으로 환암 혼수 (幻庵混修) 스님이 오자 스님은 3구 (三句) 와 3관(三關) 을 차례로 묻고, 법회를 마치고는 회암사(檜岩寺)로 돌아가셨다.
신해년(1371)  8월 26일에 임금은 공부상서 장자온(工部尙書 張子溫)을 보내 편지와 도장과 법복과 바루를 내리시고는 `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 중흥조풍 복국우세 보제존자'로 봉 (封)하시고, 동방 제일 도량인 송광사(松廣寺)에 계시라고 명하셨다.
임자년(1372) 가을에 스님은 우연히 지공스님이 예언하신 삼산양수(三山兩水)를 생각하고 회암사로 옮기려 하였는데, 마침 임금의 부름을 받고 회암사 법회에 나아갔다가 임금께 청하여 거기 있게 되었다. 스님은 "돌아가신 스승 지공스님이 일찍이 이 절을 중수하셨는데, 전란에 탔으니 어찌 그 뜻을 이어받지 않으랴" 하고는 대중과 의논하여 전각과 집들을 더 넓혔다. 공사를 마치고 병진년(1376)  4월에 낙성식을 크게 열었다.
대평(臺評)의 생각에 회암사는 서울과 가깝기 때문에 사람들의 왕래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으므로 혹 생업에 폐가 될까 염려되어 왕래를 금하였다.
그리하여 영원사(瑩源寺:경남 밀양에 있음)로 옮기라는 임금의 명령이 있었고, 빨리 출발하라는 재촉이 있었다. 스님은 마침 병중에 있었으므로 가마를 타고 절 입구의 남쪽에 있는 못가로 나갔다가 스스로 가마꾼을 시켜 열반문으로 나왔다. 대중이 모두 의아하게 여겨 소리내어 우니 스님은 대중을 돌아보고 말씀하셨다.
"부디 힘쓰고 힘쓰시오. 나 때문에 공부를 중도에 그만두지 마시오. 내 걸음은 여흥(瘻興)에 가서 멈출 것이오."
한강에 이르러 호송관 탁첨에게 말씀하셨다.
"내 병이 심하오. 배를 빌려 타고 갑시다."
그리하여 물길을 따라간 지 7일 만에 여흥에 이르렀다. 거기서 또 탁첨에게 말씀하셨다.
"조금 쉬었다가 병세가 좀 나아지면 가고 싶소."
탁첨은 기꺼이 그 말을 따라 신륵사(神勒寺) 에 머물렀다. 5월 15일에 탁첨은 또 빨리 가자고 독촉하였다.
스승은 입을 열었다.
"그것은 어렵지 않소. 나는 아주 갈 것이오."
그리고는 그날 진시(辰時)에 고요히 돌아가셨다.
그 고을 사람들은 오색 구름이 산꼭대기를 덮는 것을 보았고, 화장하고 뼈를 씻을 때에는 구름도 없이 사방 수백 보에 비가 내렸다. 사리 150개가 나오니 거기에 기도하고 558개로 나누었다. 사부대중이 재 속에서 그것을 찾아 감추어 둔 것만도 부지며, 신령한 광채가 나다가 3일 만에야 그쳤다.
석달여(繹達如)는 꿈에 화장하는 자리 밑에 용이 서려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모습은 말과 같았다. 초상 배가 회암사로 돌아올 때에는 비도 오지 않았는데, 물이 넘쳐흘렀다. 사람들은 그것이 여룡(瘻龍) 의 도움이라 하였다.
8월 15일에 회암사 북쪽 언덕에 부도를 세우고 정골사리(頂骨舍利)는 신륵사에 두었다. 화장을 하고 석종(石鍾)으로 덮은 것은 감히 잘못되는 일이 있을까 하여 경계한 것이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선각(禪覺)이라 시호를 내리고, 신 색에게는 글을 지으라 명하고, 신 중화에게는 단전액을 쓰게 하였다.
신이 삼가 생각을 더듬어보니, 스님의 휘(諱)는 혜근(惠勤)이요, 호는 나옹(懶翁)이며, 본래 이름은 원혜(元惠)이다. 향년(享年)  57세, 법랍(法瀘)은 38세이며, 영해부(寧海府) 사람으로 속성은 아(牙) 씨다. 아버지의 휘는 서구(瑞具)로서 선관령(膳官令) 을
지냈고, 어머니 정(鄭) 씨는 영산군(靈山郡) 사람이다.
정씨는 꿈에 황금빛 새매가 날아와 머리를 쪼으며 갑자기 오색빛이 찬란한 알을 떨어뜨려 품안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아기를 가져 연우(延祐)  경신년(1320) 1월 15일에 스님을 낳았다. 스님은 스무 살에 이웃 동무가 죽는 것을 보고 여러 어른들에게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는데 모두들 모른다 하였다. 매우 슬픈 심정으로 공덕산(功德山) 에 들어가 요연(了然)스님께 귀의하여 머리를 깎았다. 요연스님은 물었다.
"그대는 무엇하러 출가했는가?"
"삼계를 벗어나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부디 가르쳐 주십시오."
"지금 여기 온 그대는 어떤 물건인가?"
"말할 줄 알고 들을 줄 아는 이것이 이렇게 왔으나 다만 수행하는 법을 모릅니다."
"나도 그대와 같아서 아직 모른다. 다른 스승을 찾아가서 물어 보라."
지정(至正)  갑신년(1344)에 회암사로 가서 밤낮으로 혼자 앉았다가 갑자기 깨치고는, 중국으로 가서 스승을 찾으리라 결심하였다.
무자년(1348)  3월에 연도(燕都)에 들어가 지공스님을 뵙고 문답하여 계합한 바 있었다.
10년(1350)  경인 1월에 지공스님은 대중을 모으고 법어를 내렸으나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스님이 대중 속에서 나와 몇 마디하고 세 번 절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지공스님은 서천(西天) 의 108대 조사다.
그 해 봄에 남쪽 강제 지방을 돌아다니다가 가을 8월에는 평산(平山) 스님을 찾아뵈었다. 평산스님은 물었다.
"일찍이 어떤 사람을 보았는가?"
"서천의 지공스님을 보았는데, 그 분은 날마다 천검(千劍) 을 썼습니다."
"지공의 천검은 그만두고 그대의 일검(一劍)을 가져 오라."
스님은 좌복으로 평산스님을 밀쳤다. 평산스님은 선상에 쓰러지면서 "이 도둑놈이 나를 죽인다!" 하고 크게 외쳤다.
스님은 "내 검(劍)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사람을 살리기도 합니다" 하고 붙들어 일으켰다. 평산스님은 설암(雪艤)스님이 전한 급암(及艤)스님의 가사와 불자를 전해 신표를 삼았다.
신묘년(1351) 봄에 보타락가산(寶陀洛迦山)으로 가서 관음보살께 예배하고 임진년(1352) 에 복룡산(伏龍山)으로 가서 천암(千巖)스님을 뵈었다. 천암스님은 마침 스님네들을 천여 명 모아놓고 입실(入室) 할 사람을 뽑고 있었다. 천암스님이 물었다.
"어디서 오는가?"
스님이 대답하자 천암스님이 다시 물었다.
"부모가 낳아주기 전에는 어디서 왔는가?"
"오늘은 4월 2일입니다."
그러자 천암스님은 입실을 허락하였다.
그 해에 북방으로 돌아와 다시 지공스님을 뵈오니 지공스님은 법의와 불자와 범서(梵書)를 주었다. 그리하여 스님은 연대(燕代)의 산천을 돌아다니는 말쑥하고 한가한 도인이 되었다.
스님의 명성이 궁중에 들어가 을미년(1355) 가을에 황제의 명을 받들어 대도(大都)의 광제사(廣濟寺) 에 머물렀고, 丙申년(1356) 10월 15일에는 개당법회를 열었다. 황제는 원사 야선첩목아(院使 也先帖木兒)를 보내 금란가사와 비단을 내리시고, 황태자는 금란가사와 상아불자(象牙拂子)를 가지고 참석하였다. 스님은 가사를 받아 들고 대중에게 물었다.
"맑고 텅 비고 고요하여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찬란한 이것은 어디서 나왔는가?"
대중이 대답이 없자 스님은 천천히 말씀하셨다.
"구중 궁궐의 금구(金口) 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가사를 입고 향을 사뤄 황제를 위해 축원하고 나서 법좌에 올라 주장자를 가로 잡고 두어 마디 한 뒤에 자리에서 내려오셨다.
무술년(1358) 봄에 지공스님에게 수기(授記)를 얻고 귀국해서는 다니거나 머무르거나 인연 따라 설법하다가, 경자년(1360)에는 오대산에 들어가 살으셨다.
신축년(1361) 겨울에 임금님은 내첨사 방절(方節)을 보내 서울에 맞아들여 마음의 요체에 대한 법문을 청하고 만수가사(滿繡袈裟) 와 수정불자(水精拂子)를 내리셨다. 공주(公主)는 마노불자를 올리고, 태후는 친히 보시를 베풀고 신광사(神光寺)에 계시기를 청하였으나 사양하자 임금이 "나도 불법에서 물러가겠다" 하시므로 부득이 부임하셨다.
11월에 홍건적이 서울 근방(京幾)을 짓밟았으므로 도성 사람들이 모두 남쪽으로 옮겼다. 스님네들이 두려워하여 스님에게 피란하기를 청하자 스님은, "명(命) 이 있으면 살겠거늘 도적인들 어찌하겠는가" 하셨다. 그러나 며칠을 두고 더욱 졸라대었다. 그날 밤 꿈에, 얼굴에 검은 글이 쓰여진 신인(神人) 하나가 의관을 갖추고 절하며, "대중이 흩어지면 도적은 반드시 이 절을 없앨 것이니, 스님은 뜻을 굳게 가지십시오" 하였다. 이튿날 토지신(土地神)을 모신 곳에 가서 그 용모를 보았더니 꿈에 본 그 얼굴이었다. 도적은 과연 오지 않았다.
계묘년(1363) 에 구월산(九月山)에 들어갔더니 임금은 내시 김중손(金仲孫) 을 보내 돌아오기를 청하였다.
을사년(1365)  3월에 대궐에 들어가 물러가기를 청하여 비로소 숙원(宿願)을 이룬 뒤에는, 용문(龍門) ·원적(元寂) 등 여러 산에서 노닐다가 병오년(1366) 에는 금강산에 들어갔고, 정미년(1367)  가을에는 청평사(淸平寺)에 머물렀다.
그 해 겨울에는 예보암(猊¿岩)이 지공스님의 가사와 친필을 스님에게 주면서 치명(治命:죽을 무렵에 맑은 정신으로 하는 유언) 이라 하였다.
기유년(1369)에 다시 오대산에 들어갔다. 경술년(1370)  봄에는 사도 달예(司徒 達睿)가 지공스님의 영골(靈骨)을 받들고 와서 회암사에 두니 스님은 그 영골에 예배하였다. 그리고 곧 임금의 부름을 받고 나아가 광명사(廣明寺)에서 여름을 지내고 가을에 회암사로 돌아왔으니, 그것은 9월에 공부선(工夫選)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님이 거처하는 방을 강월헌(江月軒)이라 하였다. 평생에 세속의 문자를 익히지는 않았으나, 제영(題詠)을 청하는 이가 있으면 붓을 들어 그 자리에서 써주었는데 혹 경전의 뜻이 아니더라도 이치가 심원하였다.
만년에는 장난삼아 산수화 그리기를 좋아하여 권도(權道)의 시달림을 받았으니, 아아, 도를 통하면 으레 재능도 많아지는가 보다.
신 색은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비명을 짓는다.

진실로 선을 깨친〔禪覺〕이시며
기린의 뿔이로다
임금의 스승이요
인천의 눈이로다

뭇 승려들 우러러보기를
물이 골짜기로 달리는 듯하나
선 바가 우뚝하여
아는 이가 드물다

신령한 새매 꿈이
처음 태어날 때 있었고
용신 (龍神) 이 초상을 호위함하여
마지막 죽음을 빛냈도다

하물며 사리라는 것이
스님의 신령함을 나타냈나니
강은 넓게 트였는데
달은 밝고 밟았도다

공 (空) 인가 색 (色) 인가
위아래가 훤히 트였나니
아득하여라, 높은 모습이여
깊이 멸하지 않으리라.
展也禪覺 惟麟之角
王者之師 人天眼目
萬衲宗之 如水赴壑
而鮮克知 所立之卓
夢赫靈 在厥初生
龍神護喪 終然允藏
曰舍利 表其靈異
江之闊矣 皎皎明月
空耶色耶 上下洞徹
哉高風終 終古不滅

7년 6월 어느 날 비를 세우다

  비는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 회암사(京畿道 楊州郡 檜泉面 檜岩里 檜岩寺) 에 있다. 고려의 폐왕(廢王)인 우왕  정사년 (1377)에 세우다. 비의 높이는 5척, 너비는 3척 2촌, 글자의 지름은 7푼, 예서제액자(隷書題額字)의 지름은 3촌 3푼. 전서로 음기
(陰記) 한 것이 닳아 없어져 읽을 수 없다.
  
  나옹록(행장行狀 1)  스님 05·02·01 910 55
  백장록(3. 천화)  스님 05·01·22 901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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