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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등경전(유마경維摩經)
 스님  | 2005·02·07 11:44 | HIT : 1,308 | VOTE : 64
<경명(經名)에 대하여>

유마경의 산스크릿트 원어는 비말라끼르티.니르데샤.수트라(Vimalakirtinirdesha  su-tra)이다.  비말라(Vimala)는  사람이름이다. 뜻으로보면 [맑다] [깨끗하다]는 의미를 가진다. 끼르티는  [-라고  부른다]는  의미이고, 니르데샤는 "물음을 주고 받는다는"뜻이다. 그래서 우리말로  직역(直譯)하면 "비말라라고 부르는 이와의 문답을 주고 받은 부처님 말씀"이 된다.

고래로 비말라를 음역(音譯)하면 유마(維摩)라고 썼으나 간혹 비마라(昆滅)라고도 쓴 적이 있다. 신라때의 화엄십찰(華嚴十刹) 가운데 하나로 열거된 원주  비마라사가  대표적 실례이다. <유마경> <유마힐경> <유마힐소설경>등이 거의  같은  뜻이고, 아주 간혹 <불사담경不思談經>.<무후석경無垢釋經>이라고도 한다. 또 고전(古典)속에는 <정명경淨名經>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말한대로  [깨끗하다]는  의미를  살린 번역태도이다.

  <경전의 성립배경>

불교문헌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유마경>은  초기대승경전  가운데서도 상당히 일찍 성립된 것이리라 믿어진다. 반야(般若)사상을 표방하지만, 중관학파(中觀學派)에서와 같은 난삽한  변증법이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점, 재가(在家)불교의 위상을 드높인다는 점, 그리고 자유분방한 사상성이 뛰어나다는 점등에서 그와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유마경>의  무대는 바이샤알리(Vaisha-li)이다.

경전의 주인공 유마거사는 바이샤알리의 호부로 묘사된다. 한역으로는 [장자長者]인데  이들은  최근연구에  따르면  신흥귀족그룹이라는 것이다.
전통적 캐스트제도 하에서 막대한 부를 향유한 신흥재산가 그룹이다. 불교경전에 이 장자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기원정사를 희사한 수닷타도 장자며, 유마거사도 장자이다.

인도에서 카스트제도가  확립되는  것은  기원전  7,  8세기의  일이다. 아리얀(Aryan)이 정복자로서의 군림을 정당화시킨 사회적 제도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활약하시던 기원전 6, 7세기경에는 캐스트제도가  급격히  몰락한다. 도시국가들이 생겨나고,  상업경제가  발달하면서  전통적  질서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사상적 혼란기에 등장하는 것이 육사외도(六師外道)등의  도덕적  퇴폐주의자들 이다. 막강한 부를 향유하는 신흥 장자(長者)그룹들이 사회의 지도층  인사로서 부각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누(Manu)  법전(法典)에도  [돈은  캐스트이다]라는 선언이 언급될 정도였다. 대승불교가 성공할 수 있었던 많은 요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장자그룹의 귀의(歸依)를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초기불교 이래, 불교가 어쩔 수 없이 귀족적 모습을 띄우게  되는 한계점까지도 포함해서 말이다. 바이샤알리는 부처님 당시에도 융성한 경제를 자랑하던 나라였다. 유명한 기생 암라파알리(Amrapa-li)의 고향이며, 쟈이니즘(Jainism)의 교조 마하비라(Mahavira)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유마경>이 이곳을 무대로 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즉 경제적 번영과 도덕적 퇴폐는 반드시 자유로운  사상을  잉태한다.  새로운  가치질서를 요청하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형식주의. 권위주의는 몰락할 수밖에 없다.
  자유분방한 사회풍조는 재가불교의 발달을 부추기고 있었다. 유마거사는 이와 같은 시대분위기 속에서 태어난 위대한  사상가였다.  그는  생활속의 불교, 타락한 현실 속에서 불법을 이루려는 원행(願行)의 모델인 셈이다.

<구성과 내용>

한역본(漢譯本)으로는 지겸(支謙)의 번역 2권, 구마라집(鳩滅什)의 번역 3권, 현장(玄奬) 번역6권등이 있다. 큰 차이는 없으나, 그 가운데서 구마라집(鳩滅什)의 번역이 가장  널리  읽히고 있다.<유마경>은 문학적 성격이 강하지만 특히 희곡적  소재를  간직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구성을 가진다. 1)불국품~ 3)제자품까지는 서론부분이다.

유마거사의  위대함과  십대제자들의 형식성이 극명한 콘트라스트를 이룬다. 제자들은 유마거사의 와병 소식을  듣지만, 선뜻 문병에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두 유마거사에게 망신을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4)보살품과 5)문질품에서는 문수사리 보살이 등장한다. 유마거사의 대론자(對論者)로서는 오직 지혜제일 문수사리뿐이라고 부처님은 판단하신다. 6)불사의품~ 9)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에서는 문병을 간 보살들이  스스로의  경지를  토로하는 부분이다.

주로 불이(不二)사상이 근간을 이루면서 공(空). 반야(般若)등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이 돋보인다. 향적불품은  외계인(外界人)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특이한  장면이다.
  우주의 별세계 가운데 이상적 나라를 설정하고, 그 나라 사람들과 지구인과의 대화를 담고있다.

우리는 여기서 불전 편찬자들의 무한한 상상력을 엿본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나드는 신선한 사고(思考)의 전형을 만날수 있다. 향적이라는 나라는 고통과 슬픔이 없는  곳이다.  사바세계의  중생들은  그곳을  동경한다. 그러나 유마거사는 이 슬픔이 곧 진실한 열반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보살행품~>촉누품 까지는  마무리부분이다.  미륵보살에게  이  경전의 중요성을 부촉하시는 내용이다. 이렇게 보면 <유마경>은  5막6장쯤  되는 희곡시나리오를 연상시킨다. 때로는  희화적이고  엄숙하지만,  군데군데 극적인 반전(反轉)의 묘(妙)를 살린 뛰어난 구성이다.

심정인불토정(心淨卽佛土淨)<유마경>의 중심사상은 반야이다. 사물의 실상(實相)을  판별하는 절대적 인식이 없으면, 양면성을 통찰할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플라톤의 절대악을 연상하게 된다. 그는 <윤리학>에서 절대악을 논구 하였다. 과연 이 세상에  절대악이  존재하는가?  일반적으로  남을  때린다거나, 목숨을 빼앗는 행위는 악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전쟁터에서는 남을 죽이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많이 죽여야만 예찬을 받는다. 따라서 죽임의 행위자체를 절대악으로 치부할 수 없다. 그는 고민끝에 절대악을 [선의 결핍]이라고 규정하고  만다. 그러나 유마거사는 보다 명쾌하게 결론을 내린다. 목건련이 죄지은 비구를  교화하는 장면에서 그 잘못됨을 통렬히 지적한다.

목건련은 참회를 요구하지만 그 참회에는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죄를 지은 비구의 죄성(罪性)은 어디 있는가 몸 안에 있을까. 아니 이미  뉘우쳤기 때문에 몸 안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몸밖에 있을까.  그렇지도 않다.
죄와 죄성(罪性)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몸 안과 밖의 중간에 있는 것일까? 이는 궤변에 불과하다. 따라서 죄(罪)와 죄성(罪性)은 어디에도 있지 아니하다. 다만 그것이 있다고  고집하게  됨으로써  우리는 죄(罪)를 논하고 있을 따름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공성(空性)의  체득(體得)이다.  즉  분석적으로  이해하는 행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대상을  분석하고 사유하여 그 공(空)을 입증하기는  쉽다.  그러나  대상  자체를  보고  空을 느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것을 우리는 직관(直觀)이라고 말한다.

흔히 서양사상의 특징을 분석적인데서 찾는데 반해, 불교사상의 직관성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불교적 직관은 바로 공성(空性)을 파악하는 절대적  인식이 될 수 있다. 이 불이(不二)사상은 현실긍정의 낙관론으로 이어진다. 부정해야 할 대상을 없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불교사상의 참신성과 미래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분법(二分法)의 태도로서는 현실적  고난을 영원히 극복할 수 없다. 그곳에는 언제나 제국주의적 정복의지만이 있을 따름이다. 서양사상의 한계는 이 이분법적(二分法的) 발상에 있다.

요즈음의 자연보호라는 개념도 이분법(二分法)의 연장선상에  있다. 불교사상의 입장에서 보면, 보호하는 이와 받는 이라는 대립의식이 있을 수 없다. 인간의 삶자체가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의 순환질서 자체가 삶의 원리이다. 구태여 보호한다는 발상 자체가 이미 불이(不二)를 벗어난  편견이라고 말할 수 있다.

평화라는 서구적 개념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결코 전쟁의 반대개념이 아니다. 공존의 질서는 서로의 존재가치를 인정할 때 이루어질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평화는 [조화] [선린]의 의미를 지닌다. 대립의  양자가 본질적으로 [하나]일수 있다는 인식의 공감대를 형성해야만 한다.

불교적 불이론(不二論)은 인류미래의 영원한 [진리]이다. <유마경>에서는 이 불이(不二)의 이상이 실천적으로 전개되어야만  함을  역설하고  있다.  이점이 또한 불교사상의 현전화(現前化)라고 말할 수 있다. 재가불교의  위상(位相)을  높이려는 사상성과 함께 가장 주목할만한 실천적 의지라고 생각한다.

  <선종禪宗과의 관련>

경전이 담고 있는 폭넓은 사상성과 참신성 때문에 옛부터 선종과는 깊은 관련을 맺어 왔다. 특히 마조도일(馬祖道一)의 문하였던 대주혜해(大珠慧海)는 후학들의 지도지침으로 <유마경>을 자주 언급한바 있다. 그 외에도 황벽희운등 선사들의 어록(語錄)에는 자주 <유마경>에 대한 인용이 보인다.

  이것은 선종이 지향하던 무득(無碍)의 근거가 이곳에서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선종의 궁극적  목표는 자성성불(自性成佛)이다. 자성(自性)을  확인하는 첫번째 작업은 불이(不二)이다. 나를 떠나 날 찾으려는 외향성(外向性) 콤플렉스로서는 결코 자아(自我)를 확인할 수 없다. 그래서 육조혜는(六祖慧能) 이래 [견성見性]은 선종의 핵심적 테마였다. 나를 확인하려면, 우선 객관적 인연의 함수관계를 이해해야한다.

나라는 주관은 이웃, 조국, 자연, 우주등과 횡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 나를 에워싼 모든 실재(實在)들은 결코 나와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그 본질에 있어서 하나일 뿐이라는 자각(自覺)이 선행해야  한다. 이때 비로소 소아적 자아(小我的 自我)는 우주적 자아로 비상할 수 있다. 그때의 실천적 행위를  우리는 동체대비(同體大悲)라고 말한다.

선종의 이와 같은 사고(思考)패턴은 <유마경>과 흡사한 점이 많다. 그래서 교종이라고 해서 다분히 무시될수 있었던 교전 가운데도 특히 중요한 전적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불교는  선교융합을  표방하였기 때문에 많은 논사(論師)들에 의하여 <유마경> 연구가 진행된바있다.  특히 원효스님이 <유마경종요> <유마경소>등을 저술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비록 모두 없어져 버렸지만, 그의 사상적 폭을 짐작하게 해주는 일이다. 해방이후 우리말로 출판된 <유마경>도 다수 있지만, 그 가운데서는 백봉 김기추의 <유마경강설>, 박경훈이 번역한 <유마경>등이 추천할만 하다.

"중생이 아프기 때문에 내가 아프다는" 유마거사의 독백속에는 이분법(二分法)을 비웃는 날카로운 지성이 번득인다."부처님은 일음(一音)으로 연설하지만,중생은 만가지로 이해한다"는 가르침 속에는  중생의  허망한  인식을  꼬집는 참신성이 있다. 이 경전이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에  신라의  선조들은 현실의 아픔을 이기는 지혜를  실현하였다. 출가와  재가를 형식적으로 나누는 권위주의를 배격할수있었다. 적어도 동아시아 거사불교에 있어서 이 <유마경>은 나침판이자, 등불로서 존숭되어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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